예술의 기능

예술의 기능.

제프리 밀러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관점에 대한 비판:

19세기 초 실러(AnswerMe)와 괴테(AnswerMe)의 독일 낭만주의 이후, 많은 사람들은 미술을 현실에서 유토피아로 도망치는 탈출구, 사심 없는 자기표현이 가능한 지대, 속세의 사소한 근심걱정을 초월해 천재성이 로터스처럼 자라나는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여겼다. 이런 낭만주의적 입장은 미술과 자연을 대립시킬 뿐 아니라, 미술과 대중문화, 미술과 시장 상품, 미술과 사회적 관습, 미술과 장식, 미술과 실용적 디자인을 대립시킨다. 또 여성의 유혹을 외면하는 천재 남성을 바람직한 화가상으로 제시한다. 여성의 유혹은 창의력을 뒷받침하는 생명수를 짜 마셔 버린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화가로서의 성공과 유성생식은 상극으로 간주되었다.

많은 현대 화가들이 이런 독일 철학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낭만주의는 화가들의 지위를 업그레이드시켜 주는 탁월한 수사였으니까. … 천재는 모름지기 섹스의 유혹을 외면해야 한다는 명제는 화가들에게 다소 매력없는 자신의 여성 숭배자들과 잠자리를 피할 수 있는 좋은 변명거리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이런 낭만주의적 관점은 미술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럴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미술은 만들어서 즐겁고 보아서 즐거운 것이고, 이 즐거움은 미술이 존재할 충분한 이유일 수 있다. 이것이 낭만주의 예술관의 핵심이다. … 그런데, 다윈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즐거움은 생물학적 중요성을 나타내는 지표다. … 동물이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동물들이 먹는 즐거움을 위해 먹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는 대신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먹으면 즐거워지게 되는 ‘배고픔 메커니즘’을 진화시켰다, 라고. 낭만주의 예술관은 이 단계, 왜 우리는 훌륭한 예술을 만들고 감상하는 행위를 즐겁다고 여기는 ‘동기시스템’을 진화시켰느냐고 묻는 이 단계를 빠뜨리고 있다. 즐거움은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즐거움 그 자체)이다(see 궁극 원인 and 근접 원인).

—p396-397, The mating mind

사회적 결속, 문화적 정체성, 종교적 힘과 같은 기능을 갖는다는 관점에 대한 비판:

많은 인류학자들은 미술을 의례, 종교, 음악, 춤처럼 집단을 한데 묶어 주는 사회적 끈끈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론의 기원은 20세기 초의 기능주의 관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밀 뒤르켐, 브로니스와프 말리노프스키, 래드클리프-브라운, Talcott Parsons 등이 그 대표주자들이다. 그들이 말하는 행동의 기능이란 한 개체의 유전자를 증식시키는 일에서의 기능이 아니라, 사회적 질서와 문화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일에서의 기능을 의미했다. 그들이 내세운 미술의 사회적 기능들은 보통 ‘문화적 정체성의 표현’, ‘문화적 가치의 반영’, ‘개인의 집단에의 융합’, ‘사회적 통합의 유지’, ‘집단의식의 창조’, ‘젊은이들의 사회화’ 등이었다. 이 어구들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뿐만 아니라 이런 소위 사회적 기능들을 진화에서 말하는 기왕의 생물학적 기능들과 연결시키기도 쉽지 않다.

영장류 집단들은 이러한 메커니즘들 없이도 완벽하게 잘산다. 침팬지가 집단을 이루고 살기 위해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할 필요도 없고, 집단의식을 만들어 낼 필요도 없다. 단지 위계를 확립하고, 싸움 이후에 평화를 도모하고, 자신들의 관계를 기억하기 위한 몇 가지 사회적 본능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런 일들에 관해서라면 인간도 침팬지 못지않다. 그런데 왜 집단의 유대를 위해 미술과 의식이 필요한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시 인간 집단이 침팬지 집단보다 규모가 커서? 하지만 로빈 던바는 인간이 침팬지보다 큰 사회집단 속에서 훨씬 복잡한 사회적 관계들을 감당하는 주요 방편은 언어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 바 있다.

미술이 문화적 가치를 전달하고 젊은이들을 사회화시킨다는 견해는 얼핏 그럴싸하다. 이것을 미술에 관한 ‘선전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 이론의 문제점은 선전은 언제나 선전원들에게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있는 큰 체제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선사시대의 소규모 무리집단에서 누가 엄청난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하는 집단 선전을 만들어 낼 인센티브를 가지고 있겠는가? 엄밀하게 규정된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것은 이타적 행동이다. 다시 말해서, 엄청난 비용을 혼자서 감당하고 그 이익은 집단에 골고루 나누어주는 행위다. 보통 진화는 이러한 이타주의를 환영하지 않는다. …

문화적 가치 이론의 가장 인기 있는 변형은 대부분의 미술이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종교적 기능’을 수행했다는 가설이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원시사회의 미술품들에는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다산의 신, 조상신, 물신, 제단장식 따위의 설명이 붙어있다. 고고학자들은 최근까지도 후기구석기시대의 모든 나체 여인상에 거의 습관적으로 ‘여신’ 혹은 ‘다산의 상징’이라는 주석을 붙였다. 대개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아무런 증거도 없다. 어차피 증거도 없으니 차라리 ‘구석기 포르노’라고 부른들 어떠랴? 고고학자들이 선사시대 미술에 종교적 해석을 가한 것은 교회에서 돈을 댄 미술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유럽 미술사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건 미술에 종교적 기능을 부여하는 것은 다윈주의의 관점에서는 말이 안된다. 몇몇 고고학자들은 인간의 진화에서 미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신과 죽은 조상을 위무하고, 동물의 영혼과 접촉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 이러한 견해는 신, 조상의 넋, 동물의 영혼이 실재하지 않을 가능성을 간과하고 있다. … 하지만 종교적 힘이 깃들어 있다고 추정되는 대상을 만들고 소유하는 행위가 높은 사회적, 성적 지위를 가져다준다면, 그것은 진화가 환영하는 바다. 누군가가 많은 시간을 들여 나뭇조각을 다듬고, 물신을 만들고, 거기에 깃들어 있는 비범한 영적 힘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린다고 하자. 만약 다른 사람들이 종교적 상상력이 넘치는 이 사람에게 높은 지위나 번식기회를 제공한다면, 그러한 행위는 성선택에 의해 유지될 수 있다. —p395-402, The mating mind

성선택을 위한 적응도 지표로써의 기능을 갖는다는 견해:

인류학자 엘렌 디사나야케는 … 미술을 진화상의 목적을 위해 진화해 온 인간의 적응으로 분석하는 최초의 진지한 시도를 했다. 그녀는 인간의 미술이 생물학적 적응이 갖는 세 가지 중요한 특성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첫째, 미술은 모든 인간 집단에 걸쳐 두루 존재한다. … 둘째, 미술은 제작자와 감상자 모두에게 쾌락의 원천인 바, 진화는 적응 행동을 쾌락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마지막으로, 예술적 산물은 반드시 노력을 요하는데, 노력은 적응 논리가 없는 곳에 탕진되는 예가 드물다. 미술은 도처에 존재하고, 비용이 많이 든다. 따라서 생물학적 우연일 리가 없다. —p392-393, The mating mind

패션과 미술 사이, 몸의 장식과 삶의 장식 사이에는 뚜렷한 경계선이 없다. 최초의 미술은 바디 페인팅, 보석, 옷이었을 것이다. 어느 문화에서나 나타나기 때문이다. 미술과 공예 사이에도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공예운동을 주창했던 윌리엄 모리스가 주장했듯이 뚜렷한 경계선이 없다. 순수미술은 실용적 관점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는 반면, 훌륭한 디자인은 이미 유용한 것을 아름답게 꾸며 준다. 미술의 진화를 설명하려면 무용한 미술품과 예술적으로 만들어진 실용품 모두를 설명해야 한다. —p404-405, The mating mind

미술을 생물학적 신호 전달 시스템의 한 예로 본다면, 우리는 이것을 두 개의 상호보완적인 적응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미술을 창작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미술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어떤 면에서 보다 신비로운 것은 후자, 즉 인간의 미적 선호들의 집합이다. 풍부한 미적 감각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면, 사람들이 타인에게 미적 만족감을 주는 뭔가를 생산함으로써 섹스 파트너를 유혹하고, 사회적 지위를 얻을 궁리를 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또한 인간 역사를 통틀어 공개적으로 과시된 미술들의 거의 전부가 성적으로 성숙한 남자들에 의해 제작되었다는 사실도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뭔가에 대한 선호가 존재할 때, 이러한 선호를 섹스 파트너를 유혹하는데 이용하려는 동기는 남자 쪽이 훨씬 강하다. 미술 창작능력을 문화적 발명품이 아니라 수천 세대에 걸쳐 진화한 진정한 생물학적 적응으로 단정하는 것은 온당해 보인다. …

왜 아름다움은 거역할 수 없는 힘을 지니는가? 왜 우리 눈에는 이것이 저것보다 아름답게 보이는가? 우리의 주관적 경험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의문들이 미술의 가장 큰 수수께끼다. 미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미학에 대한 진화이론과 연결시키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쾌락이나 고통의 경험 하나하나와 관련해서도 그런 식의 노골적인 연결고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뜨거운 것을 만졌을 때, ‘아, 생존에 위협을 주는 영구적 손상을 초래할 수도 있는 국소적 열원으로부터 팔다리를 재빨리 빼도록 하기 위해 이런 척수반응이 진화했구나’ 하는 지적 메시지를 끌어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뜨거우면 손을 거둬들일 뿐이다. 여성이 오르가즘을 느낄 때, 훌륭한 유전자에 대한 짝 고르기를 촉진하는 오르가즘의 역할이 자동적으로 파악되지는 않는다. 어떠한 본능적인 반응도 왜 그런 반응이 진화했는지를 알려주는 특별한 암호문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다. 반응 자체가 생존과 번식이라는 적응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미적 환희 같은 강렬한 반응들은 강력한 선택의 힘이 남긴 자취다. 어떤 얼굴이나 몸에 대한 성적 선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미적 취향도 얼핏 변덕스러워 보일지 모르지만, 자세히 보면 내면의 논리가 있다. 만일 미술이 성선택을 통해 진화했다면, 우리의 미적 선호들은 짝 고르기 시스템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미적 선호들은 타인의 몸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선호와는 다르다. 다른 동물들처럼 우리는 체형에 관한 한 이미 풍부한 성적 선호를 갖고 있다. 미적 선호들은 오히려 타인의 확장된 표현형, 즉 그 사람이 만들고 획득하고 몸 주위에 장식하는 물건들을 평가하는 데 사용된다. 우리는 생물학자들이 짝짓기 선호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과 똑같은 성선택론들을 미적 선호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 이러한 선호들은 다음 세 가지 옵션으로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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